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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베라 내전
Mabera Civil War
기간
1973년 7월 14일 ~ 1976년 7월 18일
장소
상위 전쟁
왕당파
라 마베라 왕당파 정부
웨스타시아
지원 루이나, 플로렌시아, 빌베른
혁명정부
라 마베라 혁명정부
체르드
지원 사비에트
지휘관
왕당파 상페드로 3세 국왕, 라파엘 데 모랄레스 원수
혁명정부 마테오 콘티 총리, 엔조 바르차니 인민해방군 사령관
결과
왕당파의 승리
혁명정부 붕괴, 왕정 복귀
피해
사망 약 40만 명(민간인 포함 추정)
피란민 약 120만 명

1. 개요2. 배경3. 교전 세력4. 전개
4.1. 7월 봉기와 국제화 (1973)4.2. 교착 (1974~1975)4.3. 트리넬 탈환 (1976)
5. 민간인 피해와 보복6. 결과7. 평가8. 관련 문서

1. 개요 [편집]

마베라 내전(Mabera Civil War)은 1973년 7월 14일부터 1976년 7월 18일까지 라 마베라 연방에서 상페드로 3세 국왕의 왕당파 정부와 4월 혁명으로 들어선 공산 혁명정부 사이에 벌어진 내전이다. 내전이 시작된 날 웨스타시아가 왕당파 편에서 개입하고, 한 달 뒤 체르드가 혁명정부 편에서 의용군을 보내면서 내전은 국제전이 되었고, 이것이 2차 랜드 전쟁의 시작이 되었다.

내전은 3년 동안 이어진 끝에 1976년 7월 왕당파와 웨스타시아군이 수도 트리넬을 탈환하면서 끝났다. 혁명정부는 무너졌고 라 마베라는 왕국으로 돌아갔지만, 양측이 서로에게 벌인 보복은 라 마베라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2. 배경 [편집]

1차 랜드 전쟁에서 패한 라 마베라는 오로아 조약에 따른 배상금과 군비 제한, 봉쇄의 후유증 속에서 심각한 경제난을 겪었다. 패전 책임을 둘러싼 정쟁 속에서 좌파 연립 정부가 들어섰으나, 이 정부는 콘스탄티노폴의 혁명정부와 가까이 지내며 왕실과 군부의 경계를 샀고 1966년 군부 쿠데타로 무너졌다.

상페드로 3세 국왕은 쿠데타를 묵인했고, 군부 정권은 국왕의 이름으로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지하로 들어간 공산당은 1967년 마베라 인민해방군을 조직해 북부 산악지대에서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군부의 강경 진압은 오히려 농민과 노동자의 지지를 인민해방군 쪽으로 몰아 주었고, 1970년대 초 북부 산악지대 대부분이 인민해방군의 해방구가 되었다.

1973년 4월 인민해방군은 군 일부의 반란과 맞물려 수도 트리넬을 점령했다. 이 4월 혁명으로 군부 정권은 무너졌고, 상페드로 3세는 남부로 피신해 왕당파 정부를 세웠다. 트리넬의 혁명정부는 마테오 콘티를 총리로 내세웠고, 5월 체르드와 상호원조 조약을 맺었다.

3. 교전 세력 [편집]

왕당파는 국왕에게 충성하는 군 부대와 남부의 지주·교회 세력, 그리고 혁명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도시 중산층으로 이루어졌다. 군 지휘는 라파엘 데 모랄레스 원수가 맡았다. 왕당파는 병력은 많았지만 무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웨스타시아의 직접 개입과 루이나·플로렌시아·빌베른의 무기 지원에 크게 의존했다.

혁명정부는 엔조 바르차니가 지휘하는 마베라 인민해방군을 주력으로, 도시의 노동자 민병대와 혁명에 가담한 군 부대를 거느렸다. 체르드는 1973년 8월부터 의용군을 보냈고, 사비에트는 군사고문단과 무기를 약속했다. 그러나 루이나가 포르틸락해협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사비에트의 지원은 소량의 공수와 중립국 선박을 통한 밀반입에 그쳤다.

4. 전개 [편집]

4.1. 7월 봉기와 국제화 (1973) [편집]

1973년 7월 14일 남부와 서부의 왕당파 군대가 일제히 봉기했고, 같은 날 웨스타시아군이 왕당파 정부의 요청에 따라 국경을 넘었다. 웨스타시아는 라 마베라의 오랜 숙적이었지만, 요크 정권은 국경 너머에 체르드와 손잡은 공산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더 큰 위협으로 판단했다.

웨스타시아군과 왕당파는 여름 동안 남부와 서부의 주요 도시를 장악했으나, 가을 들어 트리넬 남쪽의 방어선에서 멈추었다. 8월 체르드 의용군이 내해를 건너 북부에 상륙했고, 9월 루이나·플로렌시아·빌베른이 왕당파 정부를 라 마베라의 합법 정부로 승인하면서 내전은 완전히 국제전이 되었다.

4.2. 교착 (1974~1975) [편집]

1974년부터 1975년까지 전선은 혁명정부가 장악한 북부·수도권과 왕당파가 장악한 남부·서부 사이에서 교착되었다. 왕당파와 웨스타시아군은 여러 차례 트리넬을 향해 공세를 펼쳤으나, 인민해방군은 북부 산악지대와 수도 외곽의 방어선에서 이를 막아 냈다.

해상에서는 루이나 해군이 내해에 들어와 혁명정부의 항구를 봉쇄했다. 체르드에서 오는 보급선이 막히자 혁명정부 지역의 식량 사정은 빠르게 나빠졌다. 반대로 왕당파 지역에서는 웨스타시아군의 장기 주둔에 대한 반감이 커졌는데, 숙적의 군대에 기대어 싸운다는 사실은 왕당파 안에서도 불편한 문제였다.

1974년 4월 루이나가 체르드를 침공하면서 혁명정부의 처지는 더욱 어려워졌다. 체르드가 자국 방어에 병력을 돌리면서 의용군 상당수가 본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4.3. 트리넬 탈환 (1976) [편집]

1976년 3월 체르드의 체르노프 정권이 무너지자 혁명정부는 마지막 외부 지원마저 잃었다. 왕당파와 웨스타시아군은 4월 총공세를 시작해 트리넬 남쪽 방어선을 돌파했고, 6월 수도를 포위했다.

7월 18일 왕당파와 웨스타시아군이 트리넬에 입성하면서 혁명정부는 무너졌다. 콘티와 바르차니를 비롯한 혁명정부 지도부는 사비에트로 망명했고, 북부 산악지대의 인민해방군 잔존 세력은 그 뒤에도 몇 해 동안 소규모 저항을 이어 갔다.

5. 민간인 피해와 보복 [편집]

마베라 내전의 사망자는 약 40만 명으로 추정되며, 그 가운데 상당수가 민간인이었다. 전투보다 더 많은 목숨을 앗아 간 것은 양측의 보복이었다.

혁명정부는 점령지에서 귀족과 성직자, 지주, 왕당파 협력자를 인민재판에 넘겼다. 반대로 왕당파는 해방한 지역마다 공산주의자와 그 가족을 색출했고, 1976년 트리넬 탈환 뒤에는 수도에서 대규모 체포와 처형이 이어졌다. 이 시기의 보복은 흔히 '백색 테러'라 불린다.

내전 동안 약 120만 명이 고향을 떠났다. 남부 출신은 웨스타시아로, 북부 출신은 체르드와 플로렌시아로 피란했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돌아오지 못했다.

6. 결과 [편집]

트리넬로 돌아온 상페드로 3세는 같은 해 가을 고령을 이유로 퇴위했고, 상페드로 4세가 즉위했다. 왕정은 회복되었지만 국왕은 더 이상 1966년 쿠데타 때처럼 군부의 뒤에 숨을 수 없었다. 새 정부는 공산당을 불법화하는 한편, 내전의 원인이 된 농촌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토지 개혁을 약속했다.

내전은 라 마베라와 웨스타시아의 관계도 바꾸어 놓았다. 왕정을 되찾는 데 웨스타시아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왕실에 빚이자 굴욕으로 남았고, 웨스타시아군의 철수가 늦어지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곧 다시 나빠졌다. 이 갈등은 1983년 마테르 전쟁으로 이어졌다.

7. 평가 [편집]

마베라 내전은 2차 랜드 전쟁의 출발점이자, 이 전쟁이 이념의 전쟁으로 바뀌었음을 보여 준 사건으로 평가된다. 1차 랜드 전쟁에서 서로 적국이었던 라 마베라 왕실과 웨스타시아가 공산 정권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이를 상징한다.

한편 내전을 끝낸 것이 라 마베라 사람들 스스로가 아니라 외국 군대였다는 점은 지금도 라 마베라 사회의 논쟁거리다. 혁명정부를 지지했던 북부 지역과 왕정을 지지했던 남부 지역 사이의 골은 이후로도 오래 메워지지 않았다.

8. 관련 문서 [편집]